
백기(白起)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상장군으로, 불패의 명장으로 불렸다.
이궐 전투와 장평대전 등에서 수십만의 적군을 섬멸하며 진나라의 통일 기반을 다졌고, 전략적 통찰과 냉혹한 결단력으로 군사사에 길이 남았다.
1️⃣ 백기의 출신과 군 경력의 시작
백기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군으로, 무안군(武安君)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지만, 《신당서》에 따르면 진 목공 시대 장수 백을병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초나라의 공족 백공승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설은 백기가 단순한 무인이 아닌, 귀족적 배경을 가진 인물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기원전 294년, 진 소양왕의 명으로 좌서장에 임명되어 한나라의 신성을 공격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이궐 전투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24만 명을 살육하고, 위나라 장수 공손희를 생포했다.
이 전투는 백기의 전략적 통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적국 간의 갈등을 이용해 기습과 분산 공격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백기는 국위로 승진하며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 동쪽을 점령했고, 위나라를 공격해 61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진나라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전술은 단순한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적의 심리를 꿰뚫는 전략적 접근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능력은 진나라가 전국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장평대전과 백기의 냉혹한 전략
백기의 군사 경력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는 단연 장평대전이다.
기원전 260년경,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는 전국시대 최대 규모의 전투로 평가받는다.
조나라의 장수 조괄이 이끄는 군대는 백기의 전략 앞에 무너졌고, 백기는 항복한 병사 약 40만 명을 생매장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결정은 오늘날에도 논란이 많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진나라의 통일 전략을 고려하면 백기의 냉철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것을 넘어서, 적국의 전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는 진나라가 이후 조나라를 압박하고, 전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평대전은 백기의 전략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전투였다.
그는 조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장기전을 유도해 조괄의 군대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후 기습과 포위로 조나라 군을 섬멸하며,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 전투는 백기를 단순한 장수가 아닌, 전쟁의 흐름을 설계하는 전략가로 평가받게 만든 계기였다.
3️⃣ 말년의 몰락과 역사적 평가
백기의 말년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평대전 이후, 진 소양왕과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궁중 내 권력 투쟁 속에서 백기는 점차 실각했다.
특히 왕의 총애를 받던 간신의 모함으로 인해 그는 자살을 강요받게 된다.
기원전 257년, 그는 두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진나라 내부의 정치적 불안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백기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는 군사적 능력만으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다.
역사적으로 백기는 냉혹한 장군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그의 전략과 전술은 후대 군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손자병법』과 함께 중국 고대 병법의 정수로 평가되며, 현대에도 그의 전술은 군사 교육에서 인용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백기를 “진나라의 통일을 이끈 명장”이라 평가하며, 그의 공로를 높이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