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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오자서에 대해서

by 머니트리001 2025. 7. 15.

오자서(伍子胥)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출신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입니다. 가족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복수를 위해 오나라로 망명하여 합려(闔閭)를 도와 오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마침내 초나라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며 극적인 복수를 이뤄냈습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복수 이야기이자, 충절과 비극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자서


오자서의 비극적인 서막: 가족의 몰살과 망명길

오자서의 비극은 초나라 평왕(平王) 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 평왕의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였고, 오자서의 형인 오상(伍尚)은 초나라 대부였습니다. 당시 초 평왕은 재위 초기 간신인 비무기(費無忌)를 총애했습니다. 비무기는 평왕이 태자 건을 위해 진나라에서 데려온 며느리 맹영(孟嬴)이 아름답자, 평왕에게 맹영을 빼앗아 자신이 취하도록 간언했습니다. 평왕은 비무기의 말에 넘어가 맹영을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 태자 건에게는 다른 진나라 여자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비무기는 태자 건의 미움을 살 것을 두려워하여, 평왕에게 태자 건이 반란을 꾀한다고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무기는 평왕에게 "태자 건이 진나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태자 건을 멀리하고 그의 태부인 오사를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끊임없이 참소했습니다. 평왕은 비무기의 간언을 믿고 태자 건을 성외로 추방하고, 태부 오사를 체포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오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아들들에게 전언을 보냈습니다. "너희들이 도망치지 않으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는다면 나를 위해 복수해 줄 자는 오직 오자서뿐이다. 오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내가 죽는다면 그 또한 죽을 것이다. 오자서가 도망쳐 복수할 기회를 찾기를 바란다."

오자서와 오상은 이 소식을 듣고 고뇌했습니다. 오상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피하여 복수하는 것은 효가 아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오사에게 갔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오자서는 복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망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초나라를 벗어나 오나라로 망명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는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밤에 도주하여 국경을 넘었고, 초나라의 추격대를 피해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식량과 물도 부족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자서는 국경의 오강(吳江)에 이르렀을 때 강을 건너야 했지만, 초나라 병사들이 자신을 쫓고 있었기에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오강의 어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척하며 강을 건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강을 건넌 오자서는 어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자신의 검을 선물하려 했으나, 어부는 "내가 당신을 도운 것은 재물을 바라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이 복수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오자서는 어부의 의로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오자서는 가족을 잃은 슬픔과 복수에 대한 굳은 집념을 가지고 험난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시작은 훗날 오나라의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무너뜨리는 극적인 복수의 서막이었습니다.


오나라에서의 재기: 합려와의 만남과 오자서의 활약

험난한 망명길 끝에 오자서는 마침내 오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합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변방의 은둔 생활을 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오나라는 내부적으로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오왕 요(僚)가 즉위한 후, 공자 광(光), 즉 훗날의 합려는 왕위 찬탈의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자서는 이러한 오나라의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복수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합려임을 직감했습니다.

오자서는 오왕 요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공자 광(合閭)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광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조언을 건넸고, 광은 오자서의 뛰어난 식견과 복수에 대한 강한 의지에 감탄했습니다. 오자서는 광에게 전제(專諸)라는 자객을 추천하여 오왕 요를 암살하도록 돕습니다. 기원전 515년, 전제는 오왕 요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고, 공자 광은 마침내 오왕 합려(闔閭)로 즉위했습니다.

합려는 오자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객경(客卿)으로 임명하고, 이후에는 재상격인 상국(相國)의 지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오자서는 합려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오나라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먼저 오나라의 군사력을 혁신했습니다. 병사들의 훈련 방식을 개선하고,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며, 병법을 가르쳐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특히 그는 손무(孫武)라는 뛰어난 병법가를 합려에게 추천하여, 손무의 '손자병법'을 오나라 군대의 지침으로 삼게 했습니다. 손무의 병법과 오자서의 전략적 안목이 결합되면서 오나라 군대는 춘추시대 최강의 군대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자서는 군사력 강화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오나라의 정치 시스템을 정비하고, 법률을 공정하게 집행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상업을 장려하여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나라는 불과 몇 년 만에 약소국에서 벗어나 주변국들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잊지 않았고, 합려에게 초나라 정벌을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합려는 오자서의 복수심과 그의 뛰어난 전략적 능력을 믿고, 마침내 초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오자서는 합려와 손무를 도와 초나라를 침공할 전략을 수립하고,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헌신과 뛰어난 능력은 오나라를 춘추시대의 패자로 만들었으며, 그에게 복수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극적인 복수와 비극적인 최후: 오자서의 종말

오자서의 복수심은 결국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나라의 군대는 손무의 지휘와 오자서의 조언 아래 초나라를 연이어 격파했습니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 군대는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초 평왕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오자서는 그의 시체를 찾아내어 300번 채찍질하는 극단적인 복수를 감행했습니다. 이는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사자성어로 전해지며, 오자서의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적인 복수 이후 오자서의 삶은 또 다른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초나라를 함락시킨 후, 오자서는 오나라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오나라 내부적으로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합려가 월나라와의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부차(夫差)가 즉위했습니다.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월나라에 대한 복수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월나라는 오나라의 심장과 같습니다.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간언하며 월나라를 완전히 제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월왕 구천(勾踐)은 계략을 써서 오나라에 미녀인 서시(西施) 등을 바치며 용서를 빌고, 동시에 명신 문종(文種)과 범려(范蠡)를 통해 오나라 내부를 이간질했습니다. 특히 범려는 오나라의 실권자인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주어 오자서를 모함하도록 했습니다.

백비는 원래 초나라 출신으로 오자서가 추천하여 관직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월나라의 뇌물을 받고 부차에게 오자서를 끊임없이 비방했습니다. "오자서는 너무 잔인하고 교만하며,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사고 있습니다. 또한, 초나라에 가족이 있었던 자로서 언젠가 오나라에 반역할지도 모릅니다." 부차 또한 월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오자서의 충언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자서가 과거 합려의 형인 오왕 요를 죽이는 데 일조했던 전례는 부차에게 불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부차의 오자서에 대한 의심은 깊어졌고, 백비의 끊임없는 모함에 넘어가게 됩니다. 부차는 오자서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오자서는 죽기 직전 "내 눈을 뽑아 오나라 동문에 걸어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내가 직접 보겠다!"는 유언을 남기며 절규했습니다. 부차는 오자서의 시신을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오자서의 죽음 이후, 오나라는 월나라에 대한 방심과 방만한 통치로 인해 급속도로 국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월왕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복수를 성공시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였습니다.

오자서는 뛰어난 능력으로 오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복수를 이뤘지만, 결국 군주의 의심과 간신의 모함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삶은 중국 역사에서 충신이 간신에게 희생당하는 비극적인 사례로 회자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의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