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말기, 천하 통일을 목전에 둔 진나라에는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李斯)입니다. 그는 초나라 상채(上蔡)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순자(荀子)의 가르침을 받아 제자백가 중 법가 사상을 익혔습니다.
이후 진나라로 건너가 탁월한 정치적 수완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진 시황제(秦始皇)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됩니다.
이사는 진 시황제를 보좌하며 진나라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통일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권력의 정점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파란만장한 과정이었습니다.
진시황의 치세와 이사의 활약
이사(李斯)는 진 시황제(秦始皇)의 가장 신임하는 신하로서, 천하 통일과 통일 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통일 전쟁 과정에서 각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세를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진나라의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진 시황제가 6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사는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유명한 상소를 올립니다.
당시 진나라는 초강대국이었지만, 여전히 각국의 인재를 등용하는 데 대한 내부적 견제가 심했습니다.
타국 출신 인재들이 진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이사는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아 그 웅장함을 이루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아 그 깊음을 이룬다"는 논리로 인재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 간축객서는 진 시황제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이방 출신 인재들이 진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천하 통일 이후, 이사의 진가는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군현제(郡縣制)'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봉건제는 제후들이 각자의 영지를 다스려 독립적으로 세력을 키울 위험이 있었지만, 군현제는 중앙에서 지방의 관리를 임명하고 통제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 진 시황제는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각 군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를 시행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했습니다.
또한, 이사는 진 시황제의 명을 받아 도량형, 문자, 화폐를 통일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각국마다 달랐던 문자를 진나라의 소전체(小篆體)를 바탕으로 통일한 것은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고 제국 내 문화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처럼 이사는 진 시황제의 곁에서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제도의 정비와 통일 제국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배경과 이사의 역할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 시황제 재위 시기 발생한 대표적인 탄압 정책으로, 이사(李斯)가 이 사건의 주요 주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크게 '분서(焚書)'와 '갱유(坑儒)'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뉩니다.
먼저 '분서'는 기원전 213년에 단행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진나라 내부에 존재하던 사상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진나라의 통일 이후, 진 시황제는 법치주의를 강화하며 모든 것을 통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유생들과 사상가들은 과거의 봉건 제도와 유교적 사상을 들먹이며 진 시황제의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특히 박사였던 순우월(淳于越)은 진 시황제 앞에서 "은(殷)과 주(周)가 봉건제를 시행하여 천 년 넘게 나라를 유지했다"며 과거 제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사는 "옛것을 본받아 오늘날의 정치를 비판하고, 백성을 미혹시키는 학자들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진 시황제에게 주장했습니다.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인 진 시황제는 의학, 점술, 농업 서적 등 실용적인 서적을 제외한 모든 역사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사상을 담은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했습니다.
이 사건은 진 시황제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확립하고 사상적 혼란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고대 중국의 중요한 문헌들이 소실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어 기원전 212년에는 '갱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분서 이후에도 여전히 진 시황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특히 자신들이 예언가라고 주장하며 시황제를 비방하던 방사(方士)들이 체포되면서 사건은 확대되었습니다.
이들은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자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진 시황제는 유생들과 학자들을 잡아 생매장했습니다.
이 사건 역시 이사가 시황제를 보좌하며 사상 탄압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서갱유는 이사가 자신의 법가 사상을 관철하고, 진 시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벌인 극단적인 조치였지만, 훗날 진나라가 멸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권력욕과 비극적인 최후
이사(李斯)는 진 시황제(秦始皇)의 신임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지만, 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습니다.
기원전 210년, 진 시황제가 순행 도중 사망하자 진나라의 정세는 급변하게 됩니다.
당시 진 시황제는 맏아들 부소(扶蘇)에게 제위를 물려주라는 유서를 남겼지만, 이사는 환관 조고(趙高)와 손을 잡고 유서를 위조하는 데 가담합니다.
이들은 부소를 제거하고 어린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구의 변(沙丘之變)'입니다.
조고는 호해를 황제로 앉힌 후 막후에서 실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사는 조고의 술수에 놀아나며 권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고는 이사가 자신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조고는 호해(진 이세황제)에게 이사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했으며, 여러 간계를 써서 이사의 가족과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했습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이사는 결국 모반 사실을 허위로 자백하게 됩니다.
이세황제는 이사의 모반이 사실이라고 믿고 그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결국 이사는 조고와 이세황제에 의해 기원전 208년에 '요참형(腰斬刑)'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요참형은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벌로, 이사는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이사는 죽기 직전 아들과 함께 고향 상채로 돌아가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고 한탄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이사는 결국 자신의 권력욕과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사의 삶은 법치주의를 통해 제국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정치가의 면모와 함께, 권력욕에 눈이 멀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습니다.